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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및 사회

판사 출신 '을사오적(乙巳五賊)'

 

을사오적은 판사 출신이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은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일컫는 말로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말합니다.

1905년 을사년에 러시와 일본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이를 을사늑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을사오적은 모두 판사출신이었음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재판은 근대적 삼권분립이 없던 시기라 행정기관이 재판을 관장하였습니다. 중앙에서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 한성부, 장례원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수령은 현대적으로 보았을 때 1심에 해당하며, 수령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 관찰사에게 절차에 따라 항소하기도 하였습니다. 관찰사는 도에서 관내 행정,사법,군사에 대한 수령의 감독기관으로 도형 이하에 해당하는 옥송(형사재판)은 직결하고 그 이상의 중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성부는 수도의 행정기관인 동시에 토지 가옥에 대한 전국에 걸친 재판권을 행사하였고, 형조는 법률,상언,사송,노비를 관창하는 사법 행정의 최고 감독기관이었습니다. 의금부는 왕족의 범죄 등 다른 재판 기관에서 판결하기 어려운 특별 형사재판기관이었고, 사형은 왕명에 의해서만 가능했습니다. 

1884년 갑오개혁 이후 재판소를 창설하였는데, 한성 재판소를 비롯하여 각급재판소에 판사 및 검사를 임명하고 배치하였습니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이완용(李完用, 1858년 7월 17일~ 1926년 2월 12일, 창씨명 리노이에 칸요, 李家 完用)은 매국노의 대명사이자 당시 내각총리대신에 올라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멸망의 길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완용은 10살 때 족보상 32촌 아저씨뻘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이호준은 흥성대원군의 친구이자 최고위 관료였습니다.

이후 25세 나이로 중광문과 별시에 병과(갑,을,병과에서도 18위)에 합격했지만 정7품이라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됩니다. 이는 후견인 이호준 때문인데요. 이후 엘리트 코스를 거쳐 미국 외교관 생활을 하였고, 이후 이조참의 외무참의 등을 지내다 아버지가 사망 후 내각총리대신까지 오르게 됩니다. 

미국에서 귀국 후 갑오개혁 이전까지 호조참의 좌부승지, 내무부 참의,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동부승지, 내무 참판, 이조참판,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외무협판 등의 벼슬을 거쳤기 때문에 사실상 판사 역할을 했을 뿐더러 갑오개혁 이후 친러파로 활동하다가 경계와 압력을 받고 학부대신에서 물러나 평남 관찰사로 전임되었고, 이후 전북 관찰사로 전임되었습니다. 

그러다 러일전쟁 이후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친일파가 됩니다.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이근택(李根澤, 1865년 9월 30일 ~ 1919년 12월 17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로 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이었습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초명은 근용(根湧) 입니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한 것이 눈에 들어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단천부사, 길주목사를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 병조참판을 역임하다가 환어계획을 세워 정부 전복을 음모한 혐의로 귀양을 간 뒤 9개월 뒤 풀려났습니다.

이후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데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한성판윤에 임명됩니다. 한성판윤은 1895년 재판소 구성법이 제정되면서 가장 먼저 설치된 한성재판소가 1898년에 이름을 한성부재판소로 바꾸면서 한성부판윤 소속으로 복귀하였는데, 한성부판윤은 한성부재판소 수반 판사를 겸했습니다. (사법부가 행정기관에서 분리되지 못함)

함경북도 관찰사, 중추원 의관에 있다가 경부대신 서리로 활동하였고, 육군참장 헌병사령관을 겸하다가 이듬해 평리원재판장 서리를 겸하며 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 조약 체결에 찬성하였습니다.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이지용(李址鎔, 1870년 10월 23일 ~ 1928년 6월 28일)은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관료로 을사 조약 체결 당시 내부대신이었습니다.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종손이며 고종의 5촌 조카였습니다.

조선의 황실 근친으로 은용이었다가 이후 지용으로 개명하였습니다. 1887년 문과에 급제 후 이조정랑, 형조참의를 거쳤고, 이조참의, 안주목사, 안악군수를 지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비서원승에서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고 바로 황해도관찰사 겸 황해도재판소 판사와 경상남도관찰사 겸 경상남도재판소 판사를 역임했습니다.  군부대신 임시서리를 맡다가 1904년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협조합니다. 이후 내부대신으로 을사 조약에 찬성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이 됩니다.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박제순(朴齊純, 1858년 12월 7일 ~ 1916년 6월 20일)은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소년기 무렵 과거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다가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중국 종사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후 청나라 텐진의 조선공사관에 부임했고, 귀국 하여 이조참의와 호조참의, 성균관대사성,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형조참판, 이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윤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습니다. 

1893 동학농민운동 이후 이조참판, 여주목사를 거쳐 장흥부사로 임명되었고, 전라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를 맡아 일본군과 연합해 동학농민군 집압에 앞섰습니다. 

아관파천 직후 중추원 1등 의관으로 승진한 뒤 외부대신 서리를 맡다가 수 차례 외부대신을 맡으며 외교교섭을 주도했습니다. 외교 교섭에 대한 공로로 일본에서 정부가 수여하는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고, 1904년 외부대신으로 임명된 후 1905년 농상공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을 맡았다가 사직소를 올려 평안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0일 후 외부대신으로 다시 입각한 후 국민교육회에 기부금을 냈고, 11월 하야시 곤스케와 을사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권중현(權重顯, 1854년 11월 27일 ~ 1934년 3월 19일)은 조선 후기의 관료로 개화파 정치인이었지만 친일파로 변절하며 을사조약을 체결합니다. 

영동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일본어를 익혀 개화파에 가담하였고, 1883년 동래감리서 서기관 발령에 이어 인천항 방판과 일본판사대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갑오개혁 이후 육군 참장에 임명된 뒤 아관파천 후 법부협판으로 이직하여 고등재판소 판사를 겸했습니다.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고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가 권형진, 안경수의 사형을 주도하며 농상공부대신으로 이임했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육군 부장으로 승진하며 평리원 재판장을 겸했고, 1905년 군부대신을 거쳐 충청남도 관찰사,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어 을사조약을 주도적으로 체결합니다.

권중현

 

조선시대는 삼권분립이 되어 있지 않은 시대

 

을사오인방에 대해 알아보며 정리를 했습니다만, 을사늑약 체결을 했던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이 판사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현대시대 처럼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로 삼권분립이 되어 있지 않은 조선시대에서는 갑오개혁 이전엔 고을 수령도 사건의 판결을 할 수 있는 이른 바 판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을사오적 모두 갑오개혁 이전에 관찰사 이상의 역할을 맡았고, 갑오개혁 이후 재판소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재판관 혹은 그 상위 조직에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현대 '직업'이라는 기준의 판사와 당시의 판사 개념은 다소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이후 숱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오적 암살단을 구성하여 처단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의미가 있었고, 을사오적의 대표격인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에게 칼을 맞아 이로 인해 폐에 입은 상처가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을사오적 모두가 선정되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 김동주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2006년 발표)에서는 이완용과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2007년 발표)에는 이지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